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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학 입학과 외환 위기

다시부자 2024. 2. 27. 04:13
IMF 구제금융 신청 후 동아일보 기사

1. 네트워크 마케팅

1997년도는 나에게 있어서 내 인생을 크게 흔들었던 한 해가 되었습니다. 대학에 입학을 했고, 입학을 할 때 철없던 나는 3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연애하기. 둘째, 락(Rock) 밴드 활동해 보기. 셋째, 장학금 타보기. 첫 번째 목표는 의지대로 바로 이루기 어려운 목표였고, 세 번째 목표도 입학 때 장학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목표였던 락밴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중, 고등학교시절 교회에서 통기타를 접하면서 꽤나 열심히 연습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목표였다. 따뜻한 봄날 입학을 하여 그렇게 락밴드 활동을 하던 중, 5월의 어느 밝고 따스한 날, 평소 음악적으로 존경하던 락밴드 선배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경제적 걱정 없이 평생 음악을 하고 싶지 않니?" 그 당시 음악을 한다는 것은 헝그리 정신으로 경제적 어려움도 이겨내며 음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내 머릿속의 상식이었다. 선배의 말에 혹하여 나는 그날 롯데월드와 석촌호수가 보이는 잠실로 향했다. 선배는 나를 네트워크마케팅 (다단계 판매) 회사로 데려간 것이었다.

네트워크마케팅

대학교 입학하기 전 OT를 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택시기사님이 네트워크마케팅이라는 대화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 말에 대꾸도 해가며 귀를 기울였던 일이 있었다. 호기심 많았던 나는 경제 관련 관심도 많았기 때문에 흥미롭기까지 했었다. 택시 기사님은 더 알려 주겠다며 자기 집에 가서 이야기를 더 해보지 않겠냐고 했고, 나는 제안을 수락하고 그분의 집에 가서 암웨이라는 회사를 알게 되었다. 다이아몬드, 골드, 사파이어, 루비와 같은 생소한 계급체계와 수입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호감이 생겼지만, 무언가 물건을 사고 소개하고 팔아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내가 갈 길은 아니라 생각하여 대충 시간 때우고 과일을 얻어먹고 집으로 갔다. 어머니에게 오면서 겪었던 네트워크마케팅과 암웨이 말씀을 드렸더니 네트워크마케팅의 취지는 소비자에게 양질의 제품을 값싸게 전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고 그중 유명한 회사가 암웨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후, 네트워크마케팅이라는 말은 내게 긍정적인 단어로 인식이 되었다. 그래서 선배가 나를 네트워크마케팅(다단계)회사에 데려갔을 때 아무 거부감 없이 교육을 받고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평생의 경제적 자유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대학의 수업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 출석을 하지 않고 다단계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학기 성적은 그 당시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던 선동렬 투수의 0점대 방어율보다 낮은 0.23의 학점으로 학사 경고를 받았다. 출석도 하지 않았기에 단 한 과목의 D를 제외하고 모두 F였다. 다단계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돈이 있어도 하루에 컵라면 한 그릇만 먹도록 하여 헝그리 정신을 배우게 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편의점에서 뜨거운 물을 붓고 전자레인지에 30초를 돌려서 먹었다. 다단계 회사와 가까이 머물기 위해 딱 누울 만큼의 공간만 있는 고시원 생활도 해 봤고, 여름 방학이 되어서는 지하에 있는 눅눅한 동아리방에 밤늦게 가서 쪽잠을 자고 아침 일찍 다단계 회사로 출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너무 힘들고 배가 고파서 신문사에 들어갔다. 왜냐면 나는 아침부터 저녁시간은 다단계에 가야 했고, 그 이후 잘 곳과 밥을 주는 곳을 제공해 주는 장소가 필요했다. 신문사는 저녁에 가면 밥통에 있는 밥과 김치를 먹을 수 있고, 잠을 재워 줬다. 그마저도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 일어나서 배달할 신문을 정리하고, 아침까지 배달을 마쳐야 했다. 신문사 사무장님이 나를 똘똘하게 보셨는지, 사무 업무를 볼 생각이 없냐고 하셨다. 급여도 배달보다 훨씬 많이 주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밥과 잘 장소, 그리고 주간에는 다단계를 해야 했기에 주간에 업무를 봐야 하는 사무 업무는 생각도 없었다. 장마기간 대부분 다가구 주택과 빌라로 이뤄진 신천에서 배달을 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신문이 젖지 않게 해야 했고,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했다. 이렇게 다단계 생활을 해오다가 너무 힘들기도 하고, 또 내가 다단계로 끌어들인 여학생에게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학교 입학해서 내 눈에 가장 빛나고 이뻤던 학생인데, 삐삐를 쓰던 그 시절 그 학생에게 용기를 내어 저녁시간에 학교 광장에서 보자고 연락을 했고, 그 학생은 그 자리에 나와 주었다. 이성적인 끌림이 있었지만, 다단계로 함께 성공하게 해 주고 그 이후 연애를 하던 뭘 하던 하자가 목표였다. 아직까지 그 학생에게는 너무 미안한 마음이 있다. 너무 힘들 생활에 회의감이 들었고, 나는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1997년 대학 1학년 1학기와 여름을 보내고, 2학기는 열심히 학교 생활을 했다. 하지만 1학기의 공백은 고스란히 나아 있었고, 학업을 따라가기도,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시골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2. IMF, 군 입대

논산 훈련소

고향으로 가니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신 부모님과 매일 먹을 수 있는 집밥은 정말 큰 행복이었다. 그 시절 부모님은 영양탕 집을 하셨다. 주 메뉴는 염소와 오리와 개. 아버지는 원가를 줄여 보시겠다고 개를 30여 마리 키우기 시작하셨고, 어느 날 아침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시고 그날 일과를 보여 주셨다. 먼저 양계장을 하시던 큰아버지에게 가서 그날 폐사한 닭을 10여 마리 담아 개 사육장으로 이동을 한다. 그리고 큰 들통에 닭을 모두 통째로 집어넣고 사료를 섞어서 4시간 정도 푹 삶는다. 그리고 오후에 구수한 냄새가 나는 그 음식을 한 바가지씩 개들에게 준다. 닭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맛있는 백숙 냄새가 난다. 하루를 그렇게 보여 주시더니 다음날 오토바이키를 나에게 주셨다. 별말씀도 없이. 나는 오토바이 타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그냥 좋았다. 하지만 오토바이키의 의미는 보여주셨던 그 일상의 루틴을 나에게 하라는 말씀 이셨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생하시느니 내가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1997년 12월 어느 날, 국가 부도의 날... 뉴스에 각종 기업의 부도와 함께 한국의 외환 위기가 오고,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됐다는 보도들이 연이어 나왔다. 나라가 정말 망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식당 매출도 줄어들고, 물가는 어마어마하게 상승을 했다. 누나와 나, 두 남매를 사립대학에 보내고 계신 부모님의 한숨도 깊어 보였다. 나는 군에 입대 신청을 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26개월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이득이라 생각됐다. 그 당시 나는 현역 1등급 신체등급 판정을 받았지만, 지역 특성상 상근예비역(1년간 자대 생활 후 지역에 와서 지역 방위)으로 1998년 가을에 입대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때가 3월 초였다. 아버지는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 사이에 상남자 셨다. 리더십도 강하셨다. 하지만 군대 얘기만 나오면 주눅이 드시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면 아버지는 4주 방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제대로 된 군대를 다녀오시길 바라셨던 것이다. 병무청에 아는 분이 계셔서 전화를 하신 모양이다. 입영 날짜가 2주 뒤로 갑자기 변경 됐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입대 날짜까지 아침부터 오토바이키를 들고 하루의 루틴을 시작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입대 전 친구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여행 한번 못해보고, 술 한잔 제대로 못해보고 군대를 간 건 아쉬운 일이긴 하다. 그렇게 1998년 3월 23일, 보기보다 마음이 여리신 아버지는 입에서 슬픔이 나올까 봐 말씀도 못하시고, 조용히 따듯한 국을 떠주시며 최선을 다해 맛있는 아침을 차려주신 어며니, 우리는 조용한 아침식사를 하고 논산훈련소로 입대를 했다. 그래도 군입대 날, 친한 1년 선배 형이 어디서 택시 기사를 대동하고 와서 나를 논산 훈련소까지 데려다줬다. 지금은 죽고 없는 그 선배가 가끔은 생각이 난다.

3. 두 번째 군 입대

공군 부사관 임관식

막상 입대를 하고 보니 보지도 못하고, 여행 한번 못해보고, 술 한잔 제대로 못해보고 군대를 간 건 아쉬운 일이긴 하다. 그렇게 1998년 3월 23일 논산훈련소 26 연대 입대를 했다. 군대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해 주고 때가 되면 영양이 고려된 다양한 음식을 먹게 해 주었고, 매일같이 운동을 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잘 곳을 제공해 줬다. 다단계 할 때 생각하면 천국이었다. 어느 날인가 갑자기 내가 어른이 된 것을 실감하게 됐다. 내 체력은 누구보다 강하고, 성인 남성으로서 부족함이 없는데, 나 스스로 반쪽짜리 어른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신적인 성인이 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경제력 측면에서 나는 아이와 같았다. 그래서 이 날부터 직업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물론 단기로 끝낼 생각이었다. IMF를 피하는 게 주목적이었으니까. 그래도 인생이 걸린 문제다 보니 바로 결정하기는 힘들었다. 하나님께 매일 기도를 드리고, 많은 고민을 했다. 학사 학위가 없기 때문에 장교로 갈 수는 없었고, 부사관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육군 입대를 했기에 6주간의 훈련 기간 중에 육군 부사관으로 지원을 하는 방법이 있었다. 훈련을 마칠 때까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대한민국 육군으로 입대를 했고, 훈련 성적도 좋았는데, 훈련 마치고 법무부 차량을 타고 어디론가 가게 됐다. 신갈에 있는 법무연수원이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경비교도대'라고 해서, 우리나라 교도소와 구치소에서 군생활은 하며 그곳을 지키고, 폭동을 진압하는 등의 임무가 있었다. 사법고시 출신들이 연수를 받는 곳이어서 그런지 밥은 정말 끝내줬다. 그런데 자랑스럽게 입었던 얼룩무늬 군복은 더 이상 입지 못했다. 회색빛의 교정국 제복을 입게 됐다. 아버지도 아들이 교도소에서 군생활을 한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으셨던 것 같다. 나도 그랬다. 하나님께 더욱 기도를 했다. 그러던 중 교도소 감시탑에서 경비를 설 때, 하나님께 '제가 부사관에 지원을 하는 것이 주님 뜻이라면 저 보름달을 안 보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는데, 갑자기 구름이 껴서 보름달이 가려졌다. 그렇게 고민을 마치고 부사관에 지원하게 됐다. 중대장에게 부사관 지원 의사를 전달했더니, 내가 망가질까 봐 육군 부사관은 절대 허가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편견일 수 있겠지만, 나도 공군 부사관에 가고 싶었다. 왜냐면, 항공관제 특기를 받고 전역 후 동남아 공항관제탑으로 취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억대 연봉이었고, 대학은 간부로 군생활하며 퇴근 후 다니면 될 것으로 생각했고, 동남아에도 국내 항공사의 노선이 잘 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한국 항공사 직원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아이에게 외국 국적 취득하게 해 주고 해외 살다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계획이었다. 항공관제특기는 공군 부사관에서도 2년 정도에 한번 정도 5~6명 정도만 자리가 있었다. IMF 시기여서 그런지 공군 부사관 시험을 치르는데 150여 명 선발에 10000명이 넘게 응시를 했었다. 내가 입대할 기수에 항공관제특기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지원했다. 만약에 항공관제 특기가 안 나와도 IMF를 피해 직업 군인으로서 경제적 독립을 하고, 서울 가까이 근무하여 대학을 졸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은 건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 우리 기수에 항공관제특기를 선발 계획이 있었다. 항공관제특기는 후보생들 중에서 영어성적이 우수하고 신원조사를 통과한 후보생을 배수로 뽑아서 정밀 신검을 통해 5명이 선발 됐다. 정밀 신검 중에 시력 검사가 첫 검사였는데, 내가 검사 순위 1번이었다. 안경을 벗고 검사를 받았더니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검사 후 의무병에게 안경 쓰고 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된다고 한다. 너무 억울했다. 저 특기를 바라보고 온 거이었는데. 관제 특기는 못 받는 것이 뻔하기에, 가장 편해 보이고, 서울 쪽으로 갈 수 있는 특기를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러려면 임관 시 성적이 우수해야 했다. 성적순으로 지망을 배정하기 때문이다. 후보생시절 후보생 자치 단체인 명예위원이라는 대표 조직이 있었다. 나는 명예위원이었다. 임관하기 전에 중대장이 저녁에 나를 찾았다. 대학 다니다가 왔는데, 장기 근무를 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을 했다. 왜냐면 임관 성적이 내가 1등이었다. 같은 중대에 3등 동기가 있었다. 나는 장기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상점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중대장에게 나와 그 동기의 상을 바꾸자고 했다. 몇 년 전 거의 20여 년 만에 그 동기를 만났다. 그 동기도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고, 진급도 빨리하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4. 군 생활

나는 교도소에서 군 생활을 할 때 너무 즐거웠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운동시켜 주고. 그때는 구타가 심했기 때문에 아무 잘못 없이 자주 구타를 당하곤 했지만, 머릿속에 아무 고민 걱정 없이 의식주와 체력까지 보장해 주는 군대는 내게 너무 편안한 곳이었다. 처음 자대 배치를 받고 제초 작업이 있었다. 나는 제초 작업이 기회라 생각 됐다. 반팔, 반바지를 입고 풀숲에서 제초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시작되자마자 나는 풀숲으로 달려들었다. 몸을 쓰는 일을 거의 해 본 적은 없지만, 팔, 다리에 풀에 긁힌 상처가 나든지 말든지 최대한의 액션을 취해 첫 휴식 시간까지 제초 작업을 했다. 역시 전략은 통했다. 제초 실적과 팔다리의 흔적을 본 선임이 그때부터 끝날 때까지 나를 쉬게 해 줬다. 나머지 동기들은 계속 제초 작업을 했다. 그리도 또 다른 즐거움은 운동할 때였다. 만년 꼴찌였던 우리 소대가 축구와 농구에서 상위권으로 진출을 하게 됐다. 고등학교 때부터 거의 매일같이 하던 축구와 농구는 나를 편하게 해 줬다. 축구할 때 주로 짬밥이 안 되는 졸병들은 물 주전자를 날라야 하고, 볼보이를 해야 했지만, 나는 항상 주전으로 축구를 할 수 있었다. 또한 농구를 좋아하던 선임들 일부에서 내가 농구를 잘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청소 시간이면 청소 열외를 받고 불려 나가서 농구를 함께 했다. 대학때 했던 밴드 생활은 부대 내에 밴드에 소속되게 되어, 타 소대 선임들의 보호도 받아가며 공연 준비도 하면서 각종 사역으로부터 열외를 받고 음악도 할 수 있었다. 나에게 군생활은 정말 마음 편한 도피처였다. 두 번째 군생활인 간부 생활을 할 때는 비록 항공관제사가 되는 꿈은 접었지만, 국방부직할부대로 발령을 받고, 사무직으로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선임은 경제 쪽으로 관심도 많고, 책을 많이 보시는 분이셨는데, 조인트를 차가면서 나의 문서 작성 능력을 키워 주셨다. 하루는 가까운 증권사에 가서 본인들 자녀의 증권 계좌와 나의 증권 계좌를 만들어 오라는 신부름을 시켰고, 계속해서 주식 관련 서적을 주시면서 공부를 시키셨다. 이때부터 나의 주식 투자는 시작 됐었다. 국방부직할부대에 근무를 하게 되면서 첫 한 달 정도는 아무 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부대 내에 있는 육, 해, 공, 해병대의 내규집을 보기 시작했다. 내규집을 다 보니, 내가 급여를 30만 원 정도 더 받을 수 있는 근거 조항이 보였다. 선임에게 허락을 받고 기안서를 작성했다. 문서 작성 능력을 통해 기안을 했고, 승인을 받아 남들보다 30만 원은 더 받을 수 있었다. IMF시절임을 감안하면 30만 원은 큰돈이었다. 그 당시 대졸 대기업 직원보다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군생활은 마치고 전역을 하니 IMF가 끝났다. 나는 대학에 복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