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당에 돌보지도 않고, 기대도 안했던 명자나무에 꽃이 피었다.
명자 나무는 수줍듯 보이는 꽃이 피어서 그런지 아가씨 나무라고도 한다.
꽃을 보면서 김춘수 시인의 '꽃'이 떠오른다. 아울러 누군가의 꽃이 되는 것과 반대로 무엇도 아닌
이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별이 힘든것은 이제 무엇인가가 될 수 없어서다. 할 수 있는것도 없다. 언젠가 할 수 있지만 안하는건 견딜수 있다. 아직은 나는 누군가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아닐때는 할 수 있는것이 없기에 더욱 슬프고 힘든것 같다.
아주 배가 고플때, 먹을 것을 두고 참는것과 먹을것이 없어서 어쩔수 없이 참아야 하는것은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이별은 무엇이었던 자신이 무엇도 아닌 것이 되는 상실감과 공허함이 크다.
헤겔 -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는 동일한 것이다
순수한 존재는 우리가 특정 범주를 정해 (맛있다. 차다. 따뜻하다) 정의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가 존재에 대해 리밋을 뒀기에 가능하지만 리밋을 두지 않는다면 존재는 아무런 규정이나 인식, 특징, 진술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무, 즉 공허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의 무엇이었을때 존재, 그리고 무엇이 아닌 존재가 되었을때 이것은 정 반대의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규정을 하지 않고, 리밋을 두지 않았을때, 반대로 말해 수학의 리미트를 무한대로 가져갈때 어느 방향으로든 무한하게 진행이 된다.
서로 다른 공간에 따로 존재하는 사실이 아니라 무한히 진행되는 하나의 세상에 공존하는 것이고 하나 존재안에 공존한다. 방향이 다를뿐... 이별과 헤어짐은 반대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진행하고 있는 같은 세상안에 공존 하는 것이다.